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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문

알고 가면 좋은 베트남 역사! 하노이 호치민 다낭 나트랑(냐짱) 달랏 여행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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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음식을 먹으며 여행지의 정취를 느낀다. 하지만 같은 곳을 가더라도 그곳이 옛날에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를 알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여행의 즐거움이 더 커진다. 특히 우리가 잘 모르는 해외여행의 경우 더욱 그렇다. 베트남 여행을 더욱 즐겁게 다녀오기 위해 베트남 전체와 하노이, 호찌민, 다낭, 나트랑(냐짱), 달랏의 역사를 훑어보자.

 

 

어깨에 짐을 메고 가는 베트남 여인
베트남을 여행을 가기 전에 베트남 역사를 알고 가자

 

 

쉽게 이해하는 베트남 역사와 주요 도시들의 역사

 

 

 

 

베트남 역사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들은 인도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베트남은 유독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트남은 동남아 유일의 한자, 유교 문화권이고 종교도 동남아 다른 나라들은 이슬람교, 힌두교, 소승불교인데 베트남 혼자만 대승불교다. 13세기 타이족이 동남아 대륙으로 이동할 당시에도 왼쪽에 가로막힌 호앙리엔 산맥과 쯔엉 산맥 덕분에 혼자 멀쩡했다.  

 

중국과 가까이 붙어 있어 기원전 111년부터 약 8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중국 지배세력과 다투는 양상을 보였고, 중국 지배에서 벗어난 10세기 부터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베트남 민족과 호치민(사이공)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 참파 민족 간의 대결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반랑, 어우락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879년 훙브엉(웅왕)에 의해 지금의 북부 베트남에 건국된 반랑인데, 실제로는 기원전 7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28년 반랑이 멸망하고 어우락이 세워진다. 

 

남월(BC 204~BC 111)

중국 진시황에 의해 중국 광동과 광시 지역에 장수 임효와 부관인 조타가 파견되었는데, 진시황 사후 독립하면서 조타가 중국 남부에 세운 나라가 바로 남월이다. 남월에는 한족은 거의 없고, 베트남의 선조인 월족이 대다수였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자 남월은 한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다가 다시 독립하여 어우락을 정복한다. 

 

한나라의 침략을 계속 막아내다가 남월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한나라는 이를 빌미 삼아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킨다. 한나라는 남월 땅에 9개의 군을 설치하게 되고, 이때 이후 천 년 동안 베트남은 중국이 지배한다. 

 

 

 

 

중국 지배 시대(BC 111~AD 938)

중국의 한나라, 위진남북조 시대, 수나라, 당나라, 오대십국 시대까지 중국이 지배했다. 한나라 초기에는 9개의 군을 설치해 간접 통치를 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다가 후한의 마원 장군이 베트남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직접통치로 바꾸지만 남부 베트남의 참파족이 일남군을 점령하고 '임읍'을 건국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를 지나 수나라는 베트남 남쪽의 참파 왕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당나라 때는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꾸준히 반란이 일어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면서 안남도호부도 철폐된다. 중국이 오대십국으로 혼란한 틈을 타 결국 939년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가 들어서면서 길었던 중국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는다.

 

대월과 응우옌(968~1884)

968년부터 1884년까지 베트남 최초의 응오 왕조에 이어 대월의 여러 왕조가 900년 간 지배했고 남쪽의 말레이계 참족이 세운 참파 왕조와 끊임없는 대결을 펼치다가 결국 응우옌 왕조가 참파를 복속했다. 마지막 응우옌 왕조 때는 서구의 동남아시아 침략 시대를 맞아 1884년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현대 베트남

제2차 세계대전 중 1940년 일본이 프랑스가 지배하던 베트남에 들이닥쳐 엄청난 식량을 수탈해간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전쟁(1946~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였고, 남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의 참전을 이겨내고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여 1975년 드디어 통일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후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1979년~1988년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싸우다가 결국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나고 중국이 베트남에서 물러나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난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 개혁개방 정책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하노이 

작은 도시였다가 1010년 전레 왕조가 하노이의 탕롱에 수도를 정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리왕조, 응우옌 왕조가 수도로 삼으면서 번영하였다. 원래는 탕롱, 통킹 등으로 불렸다가 1831년에 하노이가 되었다. 1873년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이후 프랑스 식민지의 중심지가 된다.

 

1940년에는 일본이 하노이를 점령했다가, 1945년 일본이 물러가고 북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1946~1954년까지 독립전쟁이 일어나면서 하노이는 전쟁터가 된다. 1954년 베트남의 승리로 북 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베트남 전쟁 중에는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고, 미국 철수 후 1976년 남북 베트남의 통일 후에 하노이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오래된 도시 하노이에 최근 건축붐이 일어 336미터의 '하노이 랜드마크 72 타워'와 272미터의 '롯데센터 하노이' 등이 지어져 현대적인 스카이라인이 신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쩐꾸옥 사원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롯데센터 하노이'
신구가 조화를 이룬 하노이를 보여주는 쩐꾸옥 사원(왼쪽)과 롯데센터 하노이(오른쪽)

 

 

호치민 

호찌민은 원래 '프레이 노코르(쁘르이노꼬)'라는 어촌 마을로 오랫동안 크메르 제국과 캄보디아에 속해있다가 1623년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전쟁 난민들에게 정착을 허용하면서 살기 시작했고, 캄보디아 왕국이 태국과의 전쟁에 져 약해지면서 이 지역은 베트남인들이 많이 살기 시작해 이름도 '사이공'이 되었다. 

 

1698년 베트남의 웅우옌 왕조가 이곳을 베트남 영토로 편입했고, 이름을 '자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58년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했고, 1859년 사이공은 프랑스에 함락되었고 이때부터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양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이공을 "동아시아의 진주", "동양의 파리"라고 부르는 이유다. 

 

1954년 프랑스가 물러가고 사이공은 남 베트남의 수도가 된다. 이후 1975년 북 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가 되고, 사이공은 민족 영웅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호치민'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호치민에 남아 있는 사이공 노트르담대성당
프랑스 지배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호치민의 '사이공 노트르담대성당'

 

 

다낭

베트남에서 호치민, 하노이, 하이퐁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다낭은 말레이계 참족의 언어인 Da Nak에서 유래되었는데 '큰 강의 입구'라는 뜻이다. 192년 참족이 세운 참파 왕국의 주요 도시로 오랫동안 번성했다.

 

1847년 수감된 프랑스 선교사들을 구하러 프랑스 해군이 다낭을 공격하기도 했다. 1858년부터 프랑스가 선교사 박해를 구실로 베트남을 쳐들어왔고 다낭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다낭은 토우라네(Tourane)로 불렸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963년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남 베트남과 미군의 주요 공군 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 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후에 전투' 때 많은 후에 사람들이 다낭으로 피신했다. 다낭은 현재 인구 95만으로 베트남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이자 휴양도시로 성장했다. 

 

1915년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이 설립한 참 조각 박물관에는 참족이 남긴 300여 점의 조각품을 볼 수 있고, 1923년 프랑스인이 세운 다낭 대성당 등이 근현대 유적으로 남아 있다. 

 

 

참 조각 박물관의 코끼리 조각상베트남 다낭 골든브릿지
참 조각 박물관의 코끼리 조각상(왼쪽)과 다낭 골든브릿지(오른쪽)

 

 

 

나트랑(냐짱)

참파 왕국 시대부터 '까우타라(Kauthara)'라는 항구 도시로 번성해 왔고, 당시 유적으로 포나가 탑이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점령 후에는 프랑스의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1940년대 일본군 주둔 시에는 일본어 발음으로 '나트랑'으로 불린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 나트랑은 미군의 군사 항구로 사용되었고, 격전지로 전투가 벌어졌다. 1975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이후에는 정부 고위 관료의 리조트로 이용되다가, 도이모이 개혁개방 정책 이후에는 외자를 적극 유치해 베트남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나트랑 포나가르 사원
나트랑 포나가르 사원

 

 

달랏

달랏은 해발 1,500m 높이에 위치한 도시로 '달랏'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랏(Da Lat)은 라틴어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에서 유래되었는데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신선함을"이란 뜻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달랏에는 프랑스의 세균학자인 알렉상드르 예르생과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 등 많은 탐험가들이 탐사를 다녀가기도 했고, 스위스 풍의 리조트 단지를 만들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후 많은 유럽 사람들이 해안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달랏으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39년~1945년까지 인도차이나 연방의 수도였다. 베트남 전쟁 중에는 1968년 달랏에 주둔한 남 베트남군, 미군과 베트콩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200명의 베트콩이 사망한 끝에 남베트남이 달랏을 방어했다. 지금 달랏은 나트랑과 함께 베트남의 인기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휴양도시 달랏
프랑스 휴양도시 달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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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하노이, 호치민, 다낭, 나트랑(냐짱), 달랏 등 대표적인 베트남 도시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한 나라의 역사를 짧은 페이지 안에 요약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베트남 여행을 갈 때 대략적인 베트남 역사를 사전에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역사를 알고 사람을 사귀는 베트남 여행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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