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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문

벌거벗은 세계사 92회차 정보,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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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정신적 아버지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루어 냈고, 미국의 마틴 루터킹,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같은 인권운동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내성적이었던 간디에게도 일탈로 방황하는 문제아 시절이 있었고 전환점이 있었다. 간디의 생애를 통해 인도의 근현대사를 조명한 벌거벗은 세계사 92회 회차정보를 살펴보자.

 

 

마하트마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의 삶을 살다 간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식민화와 간디의 성장

영국의 식민지 인도

1526년부터 1857년까지 번성했던 무갈 제국이 무너지고, 인도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영국의 약탈지가 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벵갈 지역을 차지하고 인도는 영국에 목화솜을 값싸게 제공하는 원료 공급지이자 인도의 목화로 영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이 팔리는 영국의 소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1857년 영국의 용병 인도인 세포이들이 종교적 신념으로 시작된 항쟁이 인도 전역에 퍼지지만 영국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되고 1858년 영국이 인도를 공식적으로 식민지를 삼는다. 영국은 1947년까지 약 90년 동안 인도를 지배하며, 경제적 수탈, 전쟁 동원, 인종차별로 인도인을 짓밟았고, 민족운동을 막기 위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유발하는 갈등 조성과 친영파 인도인을 길러내는 식민정책을 펼쳤다.

 

 

 

 

 

간디의 학창 시절과 일탈

1867년 태어난 간디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공부에도 큰 소질이 없었다. 인도의 조혼 풍습에 따라 14살에 결혼한 후, 청소년기를 사창가, 육식, 흡연, 자살 시도 등 방황과 좌절 속에 보낸다. 임종하는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정신 차린 간디는 대학생이 되지만 이내 포기하고, 1888년 영국으로 건너가 이너 템플에 입학하고 3년 만에 변호사를 취득해 인도로 돌아온다. 영국 유학 시절, 간디는 영국 신사를 흉내 내고 스타일도 변화를 주어 사교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인도에서 첫 변호를 맡지만, 너무 수줍어하여 변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평판은 떨어졌다. 좌절을 느낀 간디는 친형의 주선으로 남아프리카에서 가서 1년 동안 영국 변호사 보조 역할로 하고 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난다. 인도와 영국의 역사를 바꾼 출발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생의 전환점

인생의 전환점

간디가 도착한 남아공 나탈 주는 1843년부터 영국이 지배했고, 인도인 등 많은 아시아인이 와서 사탕수수, 차, 커피 등의 농사를 짓는 노동력을 제공했다. 인도인은 1860년 11월 첫 이주하여, 7만 5천 명이 남아공으로 왔다. 간디는 700km 떨어진 프리토리아로 첫 출장을 떠나지만, 기차와 마차에서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큰 수모를 당한다. 인종차별을 처절히 느낀 순간이다.

 

간디는 인도인을 위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년 계약이 끝나도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나탈 인도인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의 가족을 불러온다. 가족들 앞에서 간디를 주시하던 백인들에게 폭행당하지만, 고통을 견디고 간디의 비폭력에 대한 신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다.

 

영국이 금과 다이아몬드를 얻으려고 네덜란드 보어인을 상대로 일으킨 보어 전쟁에 간디는 의무병으로 참전한다. 영국에 도움을 주면 인도인의 권리 보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순진한 기대가 있던 듯하다. 이 일로 간디는 영국의 앞잡이로 비폭력을 저버렸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아시아인 등록법

영국은 인도인 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인도인을 옥죄기 위해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만들어 트란스발에 거주하는 만 8세 이상 인도인은 등록증을 만들도록 했다. 지문등록, 카스트 기록 등이 들어가는 신상 등록을 해야 했다. 간디는 3천 명의 인도인들을 주동하여 지문등록 거부 맹세를 한다.

 

이때부터 간디는 인도는 서양 옷을 벗고, 인도 옷으로 갈아입는다. 1908년 2천 개의 등록증을 불태우고 4천 명이 트란스발로 행진하였다. 간디는 주도자로 투옥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13년 광산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파업을 하여 결국 아시아인 등록법을 폐지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빛을 발했다. 간디는 1915년 영국으로 돌아간다.

 

>>비폭력 저항 운동

저항 운동과 1차 대전

영국은 벵갈 지역을 힌두교의 서 벵갈과 이슬람교의 동 벵갈로 나누어 민족주의 진영에 내부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대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영국을 몰아내고 인도인 스스로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이 일어났다. 저항 운동이 확산하고 결국 1911년 벵갈 분할령은 폐지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도도 전쟁에 휘말린다. 1915년 돌아온 간디는 인도인들이 전쟁에서 영국을 도우면 자치권을 줄 것을 기대하면서 참전을 독려했다. 130만 명의 인도인이 유럽, 중동, 동아프리카에서 영국을 위해 동원되었고, 6만 명이 사망했다. 1918년 전쟁은 승리로 끝나지만, 영국은 자치권은커녕 1919년 롤래트 법으로 인도인들을 탄압한다. 배신을 느낀 인도인들은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의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다 무차별 총격으로 42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379명이 학살당한다.

 

간디는 영국제품을 거부하고 국산품 사용을 장려하는 운동을 벌인다. 물레를 돌리는 간디가 이때부터 시작되어, 인도인들은 함께 물레를 돌렸다. 민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2만 명이 체포되고, 간디는 6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저항한다.

 

 

 

 

 

소금 행진

1924년 12월 인도국민회의 의장이 되어 네루와 같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1년 임기 후에도 1928년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1930년에는 인도 독립 선언서를 선포한다. 1930년에는 소금 제조 금지 소금세 인상에 저항하여 24일 동안 386km를 행진하는 소금 행진을 벌였다.

 

수만 명이 동참했고, 단디 해안에 도착한 간디와 시위대는 영국 경찰 앞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먹는 소금법 위반의 행위를 일부러 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이 소식은 전 세계에 퍼져 영국에 불리한 여론이 형성된다. 결국 영국은 가정용 소금 생산을 허용한다.

 

독립과 분열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은 인도의 참전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이를 거부하는 간디와 네루는 투옥되고 인도인 250만 명이 강제로 동원되고 8만 7천 명이 사망한다. 1944년부터 2년 동안 지속된 벵갈 대기근으로 300만 명이 사망하고 인도는 주저앉는다. 1945년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며, 결국 인도는 1947년 8월 15일에 독립을 쟁취한다.

 

간디는 인도 내부의 종교 간 화해를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인도는 종교 갈등으로 무력 충돌이 발생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해서 독립하고 만다. 간디는 화해를 위한 단식 후 1948년 1월 30일 극렬 힌두교도에 의해 암살되고 79세로 생을 마친다. 2백만 명의 장례 행렬이 9km 걸쳐 이어졌고, 타고르가 명명해 준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는 영원히 잠들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92회, 문제아였던 간디가 인도의 성인이 된 일생을 살펴보았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이후 수많은 인권운동과 저항 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간디의 물레는 비폭력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지은 교수님 마지막으로 남겨준 간디의 말이 마음속에 남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당신부터 변화된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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