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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문

벌거벗은 세계사 85회, 스페인 내전 - 히틀러 실험장 & 세계대전 전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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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을 2차 세계대전을 위한 무기 실험장으로 이용하고, 헤밍웨이, 조지 오웰, 생텍쥐페리 등 많은 예술가가 파시즘을 막으려고 참전합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85회, 시민들을 학살하며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어 버린 스페인 내전을 살펴봅니다.  


 

 

스페인 내전
벌거벗은 세계사, 스페인 내전의 잔인한 학살

 

>> 스페인 내전 이전의 상황

19세기 후반 스페인은 왕정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과 새롭게 각성한 지식인, 노동자, 농민 등의 진보적 세력이 엎치락뒤치락 갈등을 일으키며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20세기 초 왕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좌파와 우파의 충돌은 더욱 심해집니다.

 

에스파냐 왕국(스페인 왕정복고)

1873년 왕정이 무너지고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세워지지만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고, 1874년 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알폰소 12세가 즉위합니다. 이후 스페인은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세워지기까지 약 57년 동안 에스파냐 왕국의 시대를 지납니다. 

 

1886년 태어나자마자 왕이 된 알폰소 13세는 어머니의 섭정 후 1902년부터 실질적인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섭정 기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해 필리핀, 괌, 쿠바, 푸에르토리코의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통치에서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고, 1923년 쿠데타를 일으킨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에게 실권을 넘깁니다. 결국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스페인 왕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알폰소 13세는 축구와 성인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902년에 창단된 Madrid Football Club이 국왕컵에서 4연패 하자, 알폰소 13세가 REAR(Royal, 왕립이라는 뜻)의 칭호를 부여하여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 명칭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포르노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각본과 캐스팅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국왕이 성인 영화를 제작한다니 그 당시 백성들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 제2공화국

1931년 에스파냐 왕국이 저물고 공화정이 시작됩니다. 당시 총선에서 노동자, 농민, 진보 지식인이 지지하는 공화파(좌파)가 압승을 거두어 정권을 잡게 되었고, 대지주, 가톨릭교회, 군부 중심의 보수파 기득권층(우파)과의 갈등이 본격화됩니다.

 

1933년에는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와해하여 다시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1936년 총선에서는 좌파인 인민전선과 우파인 국민전선이 대결하는데, 10만 표도 안 되는 표 차이로 간신히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좌파가 다시 정권을 뺏어 오고, 마누엘 아사냐가 대통령이 됩니다.  

 

 

 

 

 

>> 스페인 내전의 경과

1936년 총선에서 패배한 우파와 정권을 좌파 간의 갈등은 노골화되고, 결국 내전으로 치닫습니다. 1914년~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거나 불간섭의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를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빠지게 만드는데요, 그 과정을 살펴봅니다. 

발발 배경

1936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정권을 잡은 좌파 정권의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우파의 쿠데타를 막으려고 우파 성향의 장군들을 스페인 변방으로 보내 버립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도 모로코 바다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됩니다. 

 

1936년 7월, 우파정치인 호세 칼보 소텔로가 좌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나는데요. 이를 명분으로 7월 17일 국가주의파 군대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됩니다.

 

진영 갈등과 예술인의 참전

우파 진영은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반란 진영과 이를 지원하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좌파 진영은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화 진영으로 국제 여단과 소련의 스탈린이 지원합니다.

 

국제 여단은 53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이 모여 결성되었는데요 약 3만 2천 명~4만 명의 의용군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개입하자 파시즘이 유럽에 퍼지고 또다시 세계대전이 날 것을 우려하여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국제 여단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술인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여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종군기자입니다. 스페인에 종군 기자로 입국한 후에 공화 진영의 선전 기사를 작성했고, 내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공화 진영을 돕도록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는 1940년 출간되고 1943년 영화로 제작되었는데요, 바로 헤밍웨이의 스페인 내전 체험을 바탕으로 지어졌습니다. 

 

조지 오웰

<1984> <동물농장> 등을 집필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러 왔다가 공화 진영 의용대에 입대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하기도 합니다.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조종사인 생택쥐페리는 파리 일간지의 특파원으로 와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대지>를 집필합니다.

 

피카소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의 소식을 듣고는 충격에 빠져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의 주제를 바꿔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남깁니다. 전쟁의 비극을 묘사하여 전쟁 반대와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게르니카 학살을 주제로 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진행 경과

초기 반란진영의 숙제는 바다로 떨어져 있던 모로코 지역에 있던 주력 부대를 스페인 본토로 이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최신형 수송기와 탱크 200대, 전투기 730대, 1만 6천 명의 독일 병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히틀러의 속내는 전투기 등 새로 개발한 최신형 무기들을 스페인 내전에서 실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준비를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죠.

 

소련의 스탈린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하였습니다. 소련은 300대의 탱크, 600대의 비행기, 700명의 조종사, 1000문의 대포를 지원합니다. 스탈린 또한 최신으로 개발된 탱크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된 소련의 최신 탱크들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주력 전차로 사용됩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은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무차별 폭격을 가합니다. 최신 전투기를 이용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융단폭격을 세계 최초로 실험합니다. 장날이어서 시내에 모여 있던 약 1,600명의 주민들이 학살됩니다. 3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2,500도의 고온으로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 등이 실험되었습니다. 이날은 전투기로 민간인을 학살한 최초이자 최악의 민간인 대학살로 기록되었습니다. 

 

공화 진영은 공산당이 주도권을 쥐면서 내분이 일어나 자멸하였고, 전세는 반란 진영으로 기웁니다. 1939년 1월 26일 카탈루냐가 함락되고 프랑코는 바르셀로나에 입성합니다. 프랑코 군대는 단 5일 만에 바르셀로나 시민 1만명을 학살합니다.

 

1939년 3월 28일 프랑코의 반란 진영이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고, 4월 1일 종전 선언으로 스페인 내전은 끝을 맺습니다. 이후 스페인 민중들은 36년 동안 프랑코의 독재 통치를 받게 됩니다.

 

 

독일의 메서슈미트 전투기
독일의 메서슈미트 전투기, 스페인 내전에서 실험되었다.

 

>> 스페인 내전의 평가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한 나라의 내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스페인 내전을 발판으로 파시즘은 더욱 확대되어 결국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살

최신 무기를 사용한 무차별 학살은 스페인 내전의 가장 잔학한 부분입니다. 특히 평소 공화 진영을 지지했던 게르니카는 프랑코의 결심에 의해 독일 군단이 투입되게 됩니다. 명백히 의도성과 계획성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게르니카 학살을 겪은 목격자나 독일의 헤르망 괴링 같은 전범자의 재판 증언을 통해서 볼 때도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대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코 군대 또한 자신을 반대한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 시민들을 처참히 학살했습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의 독립의 의지는 더욱 강해진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무기 실험장

스페인 내전은 독일과 소련의 최신예 무기들의 성능을 점검하기 위한 실험장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군수품 공장이 폐쇄되고 막대한 배상금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겪었습니다. 1933년 총리가 된 히틀러는 야망을 불태우며 비밀연구소를 세워 신무기를 연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눈치를 보며 실험할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스페인이었던 겁니다. 스페인 내전을 실험장으로 삼아 신무기를 시험한 것은 소련의 히틀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스페인 내정 당시 유럽은 소련 등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세력과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파시즘과 반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정세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내전에서 불간섭과 관망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20세기 이념들의 격전장으로,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85회에 방영된 스페인 내전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존 질서와 새로운 세력이 갈등하는 스페인 내부의 정치적인 상황과 주변국의 이념적인 대립이 맞물리면서 스페인 내전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 내전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고, 전쟁 준비에 정신없는 강대국들의 무기 시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국제질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방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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