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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문

벌거벗은 세계사 86회 - 도쿄 전범재판, 일본과 독일의 다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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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86회 리뷰입니다.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수많은 학살과 만행을 저지른 전범국가입니다. 도쿄에서 전범재판이 열리지만 그 결과는 흐지부지됩니다. 일본의 배후에는 누가 있을까요?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일본과 독일을 살펴봅니다.

 

 

벌거벗은세계사
일본의 전쟁책임을 물은 도쿄 전범재판을 파헤쳐 봅니다.

 

>> 일본

일본은 대만, 우리나라, 만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일반 주민과 포로들에게 갖은 만행을 저지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을 받지만 깨끗하게 청산되지 못하고, 일본은 오히려 전범들이 주요 요직에 진출하며 우경화되고 마는 데요,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1. 일본의 만행

1936년 731부대와 마루타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의 주도로 만주에서 잔혹한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자 합니다. 인체실험의 대상을 마루타라고 불렀는데요, 조선인,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연합군 포로 등 전쟁 포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731부대는 이들을 대상으로 동상 실험, 산 채로 해부, 탄저균 폭탄 실험, 콜레라균, 페스트균의 강제 주입 등 상상하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731 부대의 만행은 아직도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약 3천 명의 피해자 명단이 공개된 상태입니다. 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인체 실험 자료를 미군에게 넘기고 전범 처벌에서 면죄됩니다. 소련에 체포되었던 731 부대 출신들도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고, 고위 관계자들은 일본 학계 등에서 승승장구합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입니다.

1937년 난징 대학살

중일전쟁 당시 1937년 12월 난징에 도착한 일본군은 6주 동안 중국군 포로와 난징 시민 30만 명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당시 부대장인 마쓰이 이와네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군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을 자행하는 일본군 부하들의 야만적인 살인을 방관합니다. 일본군은 목 베기 시합, 생매장 등 야만적인 살인을 저지릅니다.

 

마쓰이는 결국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지만, 아사카노미야는 쇼와 천황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소환조차 되지 않습니다. 배후에는 미국과 일본 천황의 거래가 있었습니다.

1942년 버마 죽음의 철도 

버마를 침공한 일본은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양곤과 태국의 방콕을 연결하는 400km 구간에 철도를 건설합니다. 1942년 9월 ~ 1943년 10월까지 25만 명의 전쟁포로(아시아 포로 20만, 연합군 포로 6만)가 하루 12~20시간 동안 폭염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영양실조, 콜레라, 부상, 과로 등으로 11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외에도, 필리핀 바탄(Bataan)에서는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 7만 명을 120km 강제 이동시키면서 학대하고 살해하여 1만 6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 불립니다.  

 

 

 

 

 

2. 도쿄 전범재판(극동 국제군사재판)

포츠담 선언과 원폭 투하

1945년 7월 26일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합니다. 일본이 끝까지 거부하자,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일본은 항복하고,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주둔합니다. 

 

도쿄 전범재판(극동 국제군사재판)

1946년 1월 극동국제군사재판소가 도쿄에 설치되고, 11명의 재판관과 이 임명됩니다. 28명의 전범이 기소되어, 1946년 5월 ~ 1948년 11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재판이 열립니다. 최종 판결은 28명 중 도조 히데끼 등 7명 사형, 16명 종신형, 1명 20년형, 1명 7년형, 2명은 판결 전 사망, 1명(오카와 슈메이)은 정신이상으로 면제됩니다. 종신형을 받은 16명 중 10명이 1950년대 중반에 감형으로 석방되고, 나머지는 투옥 중 병으로 사망합니다.

 

어떻습니까? 수십만 명의 학살과 만행을 저지른 죄질에 비하면 재판의 결과는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여기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쉬쉬하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아직도 세계 정치 질서에 드러나 있으며, 우리가 냉정히 바라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3. 일본의 배후 미국

일본의 전범재판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이 많고, 재판받아야 할 전범 중에 빠져나간 사람도 많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챙기고 세계 정치 질서에서 일본을 이용하려는 미국의 계산이 있습니다.

 

천황과 맥아더의 거래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의 최고 통수권자인 일본의 124대 천황 쇼와 덴노(히로히토)는 당연히 전범 재판에 소환되어야 했지만 미국 정부와 맥아더의 개입으로 재판에 소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의 통치를 원만히 하기 위해 쇼와를 재판에 넘기지 않았고, 쇼와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1946년 1월 1일 인간선언)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거래입니다.   

 

731부대 전범 제외

미국은 731 부대 전범들이 가지고 있는 인체 실험 자료를 얻기 위해 또 거래합니다. 생체실험 자료를 얻는 대신 731 부대원들을 전범 재판에서 제외하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까지 합니다. 전범 이시이 시로도가 대표적인 인물로 전범에서 면책될 뿐 아니라, 25만 엔을 대가로 받고, 미국의 세균무기 실험소의 고문으로까지 활동합니다. 

 

만주국의 인사와 재정을 총괄하면서 731부대를 후원했던 기시 노부스케 또한 증거불충분으로 전범에서 제외됩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총리에 오르면서 승승장구합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바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입니다.

 

 

 

 

>>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독일의 전쟁 개시로 2,900만 명의 사망자, 1,000만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945년 ~1948년 진행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 24명이 판결받았습니다. 공군 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 등 12명 사형(1명 자살, 10명 형 집행), 3명 종신형, 나머지 10~20년 금고형입니다. 전쟁의 주범인 히틀러, 괴벨스, 하인리히 등 10여 명은 체포 직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독일과 일본의 다른 길

서독 또한 초기에는 나치 잔당들이 요직에 등용되는 등 나치의 잔재를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미국, 서독, 체코, 스페인, 일본 등에 퍼진 68운동 후 서독은 탈 나치화, 나치 잔재 청산, 사죄와 배상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주변국가들에게 통일 국가의 승인도 받으면서 통일 독일을 이룩하였습니다. 현재 독일은 제4의 경제 대국으로 EU의 리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호 속에 한숨을 돌린 일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경제가 부흥하고 현재 제3의 경제 대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과거사 청산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우경화되고 있는데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순국칠사묘 건립 등으로 전쟁에 대한 사과는커녕 전쟁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 중국, 동남아시가 국가 등 주변국의 불신과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요, 정치적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미래가 주목됩니다. 

 

일본의 전범재판은 흐지부지되었고, 일본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전쟁 수행을 통한 학살과 만행을 사과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보호하고 있는데요,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이면에는 미국의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시아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일본을 비호하는 미국의 속셈 등으로 아시아의 정치는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과거는 과거로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찜찜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죠. 아시아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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