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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문

벌거벗은 세계사 88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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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근대 과학이 꽃피우기 전 갈릴레오를 비롯한 소수의 선구자는 종교라는 거대한 상식의 벽에 부딪혀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88회, 갈릴레오 갈릴레이 편을 통해 진실을 외쳐 불편해야 했던 거인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퀸스대학교의 갈릴레오 동상
영국 북아일랜드 퀸스대학교 벨파스트에 있는 갈릴레오 동상

 

 

>> 갈릴레오 이전의 상식

기원전 5세기의 플라톤으로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이 주창되었고, 천동설은 16~17세기 근대 과학이 싹틀 때까지 종교적 세상의 상식이자 신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310년경에 태어난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는 태양, 달, 지구의 크기와 거리를 연구하면서 인류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1700년이 지난 1473에 폴란드 왕국에서 태어나고 가톨릭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지동설을 재정리하여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집필하였는데, 학계의 비난을 피해 말년에 가서야 출판하게 됩니다.  

 

 

 

 

 

>>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던 갈릴레오의 생애 

 

수학자 갈릴레오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 북서부 피사에서 태어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집안의 기대로 피사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지만, 수학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결국 21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족 자제 수학교습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수학의 세계에 집중합니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던 중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문구를 해석하여 지옥이 지구의 14분의 1의 크기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해 냅니다. 이를 계기로 1589년 25살에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됩니다.

 

갈릴레오의 커지는 의문

교수 생활을 하는 갈릴레오는 계속해서 기존의 상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성격상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낙하 운동에 관한 법칙에 따라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더 빨리 떨어지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갈릴레오는 논문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주장합니다.

 

이에 따라 교수 재임용에 실패하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의 재정적인 부담까지 지게 됩니다. 1592년 귀족들의 도움으로 파도바 대학 수학 교수가 됩니다. 귀족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과외를 진행해 돈도 벌고, 온도계, 군사용 컴퍼스를 발명하고 생산하는 공장까지 설립합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보며 지동설처럼 지구가 움직인다면 밀물과 썰물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천동설에 의문을 가집니다. 1604년 초신성인 케플러의 별이 나타났을 때도 천동설에 반하는 내용으로 저서를 저술합니다.  

 

 

 

 

 

 

망원경으로 발견한 불편한 진실 

갈릴레오는 1609년 네덜란드 미델뷔르흐(Middelburg)의 안경 제작자들이 망원경을 제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능이 더 좋은 20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어냅니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의 종탑에서 귀족, 고위 공직자들을 모아 놓고 망원경 신상품 쇼케이스를 펼칩니다. 군사적으로 유용했던 망원경으로 갈릴레오는 평생 연금을 보장받는 등 경제적으로 보장받습니다. 

 

망원경으로 본 불편한 진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면서 자꾸만 불편한 진실에 접하게 됩니다.

1) 달을 관측하여 달의 표면이 천동설이나 가톨릭의 상식처럼 매끄럽고 흠결 없는 상태가 아닌 것을 봅니다. 달을 달로 보게 된 것이죠. 갈릴레오의 달 표면에 대한 관측을 근거로 당시 예술가들도 달을 다르게 그리기 시작합니다. 

2) 금성이 초승달 모양이 되면 커지고, 보름달 모양이 되면서 작아지는 것을 봅니다. 이는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고, 지구와 천체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동설을 적용해야 설명된다고 주장합니다.

3) 망원경으로 목성 주변을 도는 4개의 작은 위성들을 발견합니다. 칼리스토, 가니메데, 유로파, 이오라고 불리는 목성의 위성들은 천동설에 반하는 발견입니다. 점점 가톨릭과 학계와의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4) 망원경 관찰을 통해 태양의 흑점은 태양 자체에 있는 오점이라는 종교계 입장에서는 매우 불경스러운 해석을 내립니다.

 

갈릴레오 종교재판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 성경에 거짓된 서술이 있다는 편지 내용으로 인해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1616년 2월 16일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버린다는 강제 서약을 하고 겨우 풀려납니다. 이 당시 가톨릭 사제였던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동설을 지지하다가 8년간의 고문 끝에 1600년에 화형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시기였고,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책도 금서로 지정됩니다. 불편한 진실이 완고한 상식에 묻혀 버리는 시기였습니다.

 

갈릴레오의 오랜 친구였던 우르바노 8세(Papa Urbano VIII)가 로마 교황이 되고, 1632년 갈릴레오는 <천문 대화>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작중 세 인물의 대화를 통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해 대화하면서 지동설이 우세한 것을 슬쩍 드러내고 있습니다. 책은 인기를 얻었고, 예수회와 교황은 반발합니다. 결국 1633년 두 번째 종교재판을 받은 갈릴레오는 유죄로 판결받고 서약과 아울러 평생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갈릴레오는 건강과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지내다가 1642년 1월 8일 77세로 운명합니다.  

 

 

 

 

>> 갈릴레오를 추억하며

갈릴레오 사후 <천문 대화>는 영어판으로 출판되었고, 1737년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한쪽 구석에 안치된 묘가 본관으로 이장되었습니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갈릴레오 재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세상의 거대한 상식 속에서 불편한 진실을 보며 살아야 했던 갈릴레오의 일생이었습니다. 

 

갈릴레오의 사후 다음 해인 1643년에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고, 뉴턴은 과학혁명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턴이 케플러, 데카르트, 갈릴레오와 같은 선구자를 추억하며 남긴 말로 벌거벗은 세계사 88회의 리뷰를 마칩니다.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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